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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고 1층에 있는 생활갤러리에서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전시회가 보름 동안 열렸다. 진주문고는 내년이면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시사IN 조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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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책방 인생 40년’이다. 1982년 경남대에 입학한 여태훈씨는 대학 시절, 학교 앞 단골 서점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책방 주인은 별일 없이도 습관처럼 서점을 찾는 그에게 서점을 맡기고 외출하기도 했다. 그러다 ‘서점 알바’를 하게 되었고, 졸업 후인 1986년 9월에 사회과학 서점이 없던 경상대(현 경상국립대) 앞에 ‘ 중소기업 공제사업기금 개척서림’을 차렸다. ‘금서’를 팔아 경찰서에도 여러 번 들락날락해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었다. 공무원 말고는, 장애인의 직업 선택에 한계가 너무 많았다. 서점 알바를 하면서 서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알게 되었고,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서점을 차렸다. 책방지기는 어쩌면 운명의 직업이었다. 처음에는 캐피탈대출금리 서점 이름을 ‘시대정신’이라고 정했다. 당시는 서점에서 책 포장을 해주던 때라, ‘시대정신’이 적힌 책 포장용지도 미리 인쇄해두었다. 그런데 그런 특별한 이름은 단기간은 몰라도 나중에 손님이 느는 데 부담스럽게 작용할 것 같더라. 그 포장지를 폐기하고 이름을 ‘개척서림’으로 바꾸었다. ‘개척자’는 당시 경상대의 상징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상인의 피가 차량연비프로그램 흘렀던 것 같다(웃음).”(여태훈)
진주문고의 여태훈 대표. 진주문고의 누적 회원은 15만명이 넘는다. ⓒ시사IN 조남진
진주문고의 누적 회원은 15만명이 넘는다. 진주시 인구가 33만7000여 명이니 진주 사람 두세 명 중 한 명은 진주문고의 회원인 셈이다. 진주문고 매출의 80% 이상이 단골손님의 구매에서 나온다. 회원 관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건 1988년에 장소를 이전해 ‘책마을’을 만들 때부터였다. 사회과학의 시대가 저물 무렵이었고, 여 대표 또한 ‘지식과 문화, 지역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책마을’을 세미나·강연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회원제를 실시해 독자 데이터를 쌓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오기 전부터 서점 회원들과 함께 문화유산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문화 행사를 많이 열었다. ‘진주의 어른’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과 인연을 맺은 것도 책마을 시절이었다. “책마을 시절에 지역신문 〈진주신문〉 창간에 관여했다. 지역 토호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신문을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때 ‘인생의 멘토’ 김장하 어른을 만나게 되었다. 진주문고의 역사는 그분 없이는 설명이 안 된다.”
1992년, 2층(책마을)에서 내려와 1층에 진주문고를 열 때 경제적으로 곤란했다. 친분이 있던 당시 〈진주신문〉 발행인(고 박노정 시인)이 여 대표 모르게 김장하 이사장에게 이런 상황을 전했다. “어느 날 김장하 선생이 ‘한약방으로 한번 와보라’고 했다. 내가 뭔 잘못을 했나, 덜컥 겁이 났다. 속은 따뜻하지만 스스로에게 철저한 분이라 제가 무서워했다. 갑자기 왜 부르시나, 덜컥 겁부터 났는데, ‘서점을 옮겨야 한다며? 얘기 들었다. 이거 보태라’ 하면서 봉투를 주더라.” 5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어른 김장하’와 진주문고의 인연
1998년 IMF 외환위기 때도 한 번 더 도움을 받았다. 거래하던 서적 도매상이 부도나는 등 벼랑 끝에 몰리게 되었다. 친척들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번에는 여 대표가 김 이사장을 찾아갔다. 처음 받은 돈을 갚지 못한 상태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을 만큼 절박했다. 이틀 뒤에 김 이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한약방에 와봐라.’ 이번에도 봉투를 건넸다. 5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다른 이에게 들어보니, 그때 김장하 어른이 운영하는 한약방도 어려웠을 때라고 하더라. 외환위기로 어려운데, 누가 한약을 지어 먹겠나? 나에게 그 돈을 왜 주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지역 단체들이 그분 도움을 많이 받았고, 장학금 말고는 그분이 개인에게 돈을 준 경우가 없다. 진주문고가 지역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고 보고 돈을 주신 거 같다.”
언제까지 갚으라는 말이 없었지만 여 대표는 그 돈을 빌린 거라고 여겼다. 2000년대 후반쯤에 책 몇 권, 차 한두 통을 갖고 한약방에 가서 돈을 돌려드렸다. “그 돈 덕분에 다 이겨내고 이렇게 갚으러 왔다고 하니까 무척 좋아하셨다. ‘이자는 어떻게 할까요’ 물으니, ‘이자는 무슨, 그동안 서점 운영 잘하면 됐다, 앞으로 잘해라’ 하고 격려하시더라.” 그렇게 돈을 갚고 와서 여 대표는 사나흘 몸살을 앓았다. “그분이 빌려준 돈의 무게, 마음의 부담감이 컸나 보다.” 여태훈 대표는 2022년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방송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인터뷰할 일이 있으면 ‘지역의 어르신’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선행을 알리기 꺼리는 그의 뜻을 잘 알아서였다.
‘어른 김장하’의 도움으로 지금의 진주문고가 가능했다. 2021년 여태훈 대표가 ‘책과 사람이 만나는 독서문화공간을 제공해 지역 주민과 청소년 독서문화 확산에 공헌했다’는 사유로 진주교육상을 받았는데, 그때 여 대표는 나눔의 선순환을 떠올렸다. “언젠가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했는데, 서점을 키우고 싶다는 제 욕심이 커서 평생 가도 여유로운 걸 모르고 늘 부족함만 알고 지나갈 것 같았다. 수상을 계기 삼아 장학금을 내고 싶다고 하니 교육장이 ‘책을 기부해주면 같은 금액이라도 더 많은 학생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겠냐’고 했다. 여러 학교로부터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받아서 1100만원어치 책을 기부했다. 매년 100만원씩 증액해, 올해는 1500만원어치 책을 지역 청소년에게 나누었다. 그래도 최소 10년은 해야 ‘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나.” 여 대표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책 나눔을 실천하려 한다.
여태훈 대표의 사무실에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한약방 문을 닫던 날, 함께 찍었다. ⓒ시사IN 조남진
근 40년 동안 진주문고는 변신을 거듭했다. 사회과학 전문서점으로 시작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했고, 이후 종합서점으로 탈바꿈했다. 네 개 매장을 운영하다 두 개로 줄였고, 코로나19 팬데믹 즈음에 다시 매장을 네 개로 늘렸다(진주문고 본점·MBC점·혁신점·초전점). 여태훈 대표는 “서점은 가장 아날로그적이면서도 가장 트렌드에 민감하다. 매 순간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서점을 열고, 이전하고, 확장하고, 공간을 리뉴얼하는 등 그동안 14차례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서점 공간을 대하는 독자(고객)의 눈이 점점 높아지는데, 거기에 적어도 50% 이상은 따라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서점에 변화를 주었다. 진주의 상권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구도심에서 주거단지가 들어선 신도심으로 본점을 옮긴 것도 그래서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진주 동쪽에 혁신점을, 북쪽 신도시에 초전점을 새로 열었다. “동쪽 혁신도시에 공기업을 다니는 젊은 독자가 많았다. 혁신도시라고 건물을 많이 지었는데, 빈 곳이 많았다. 오프라인 매장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2021년에 혁신점을 냈더니, 북쪽에 있는 신도시 고객들이 자기 동네에도 서점을 내달라고 요청해왔다. 이런 요청을 받고서 ‘우리 참 행복하네’ 했다. 결국 진주의 동서남북에 진주문고를 두게 되었다. 나중에 만든 두 서점의 수익이 괜찮다.”
진주문고 본점에서는 북토크 등 문화 행사가 자주 열린다. ⓒ시사IN 조남진
“‘끝까지 서점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여태훈 대표는 지난해 1월 경남 하동 평사리에 독립서점 하동책방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고향에 ‘마을 공공재’ 역할을 하는 책방을 열고 싶었다. 주민 공정여행사 ‘놀루와’의 조문환 대표가 공간을 제공했다. 폐교를 새로 단장한 악양생활문화센터 1층에 하동책방을 열었다. 중고교 동창인 강성호씨가 책방지기를 맡았다. 책마을 시절에 함께 일하다 교사에 임용되었던 강씨가 정년 퇴임 후 귀농을 준비하다가 여 대표의 하동책방 이야기를 듣고 책방지기로 나섰다. 대략 35년 전 책방에서 같이 일했던 두 사람이 다시 책방 인연을 이어간다.
1989년 2월, 책마을 시절에 함께 일했던 청년 여태훈과 청년 강성호(왼쪽부터).ⓒ강성호 제공.
40년 가까이 서점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으니 여태훈 대표는 ‘관계’를 말했다. 그에게 책방은 ‘책을 파는 게 아니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를 심화시키고 이어가는 과정’이었다. “서점을 찾는 고객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상식선을 갖고 있고, 자기 희생도 할 줄 알고,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할 줄도 아는 사람들이다. 책방을 하면서 그런 분들과 관계를 만들고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데 매력을 느꼈고, 그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창립 35년을 기억하는 어느 글에서 여태훈 대표는 이렇게 썼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왔던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되어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책방을 찾는다. 삼대가 함께 나들이를 하는 곳. 우리 책방이 아니면 이 찬란한 연결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음을 기억하며 기록하는 일이 어디 흔하겠는가’라고.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는 “진주에서 끝까지 서점을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여태훈 대표가 서점을 처음 열었을 때, 진주에는 서점이 60∼70개 있었다. 지금은 독립서점까지 15군데가량 남았다. 진주문고가 지역에서 꽤 탄탄하게 자리 잡았지만, 오프라인 서점을 둘러싼 환경 변화는 만만치 않다. 여 대표는 서점이 밥줄이고, 생명줄이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40년을 보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마지막 서점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진주에서 처음으로 서점을 연 사람은 아니지만, 끝까지 서점을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그 말이 아직 유효하냐고 묻자, 간단히 답했다. “진주에서는, 뭐 그래될 것 같다(웃음).”
진주·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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